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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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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에세이) 작은 숨결을 바라보며 딸아이가 백일을 갓 넘긴 어느 날이었다.온종일 집 안을 탐색하고, 까르르 웃었다가,금세 울음을 터뜨리기를 반복하더니,결국 지쳐 스르르 잠이 들었다.나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포근한 이불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작은 몸.세상의 어떤 걱정도, 두려움도 비집고 들어올 틈 없는 얼굴.고르고 평온한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괜스레 웃음이 새어 나왔다.참 좋겠다, 우리 딸은.엄마랑 아빠가작은 투정 하나하나 다 받아주고,눈물 바람엔 어쩔 줄 몰라 달래주고,배고플 새라 정성껏 먹여주고,작은 열에도 밤새 곁을 지켜주니.그래서 이렇게 세상 가장 편안한 얼굴로 잠들 수 있구나.그 평화로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니,어느새 내 마음속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나는 언제 저렇게 편안했을까?아주 먼 옛날, 나 역시도저런..
(에세이) 시간을 넘어서는 진심 중학생이던 시절손목 위에서 반짝이는 시계 하나가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시계 하나를 갖고 싶다는순수한 바람 하나로,나는 동네 치킨집 전단지를 손에 들었다.전단지 한 장에 20원.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땀을 흘렸고,그 종이들을 하나하나 붙이며 하루를 보냈다.그렇게 계절이 두 번쯤 바뀌었을 무렵,손에 쥔 지폐들이 모여삼십만 원이라는 돈이 되었다.너무나 갖고 싶던 시계가이제는 손닿을 듯 가까워졌던 때였다.—어느 날,어머니와 함께 마트에 갔던 길.작은 악세사리 가게 앞에서평소 무심히 지나치던 어머니의 발걸음이 멈췄다.잠시였지만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곳.얇지만 금빛 반짝임을 가진 목걸이였다.그렇게 한 자리에 오래 시선을 두는어머니의 모습을나는 처음 본 것 같았다.진열대 아래 적힌 숫자.14K.그 아래..
(육아, 에세이) 아빠가 된 순간 아이의 세상에“엄마”는 햇살처럼 스며들었다.처음 웃을 때도, 울음을 터뜨릴 때도망설임 없이 그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아빠”라는 말은 좀 달랐다.아이의 입가에 머물다쉽게 열리지 않는 문처럼 느껴졌다.나는 늘 곁에 있었지만아이에게 나는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 같은 존재,어디까지 닿지 못한조금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인지마음속 어딘가엔조용히 쌓여가는 기다림이 있었다.—그러던 어느 저녁.식탁 위 조용한 불빛 아래서아이가 나를 바라봤다.그 눈빛은호기심인지 그냥 응시인지 알 수 없었지만,그 시선 끝에서입술이 조금 움직였다.“아… 빠.”말보다는숨처럼 흘러나온 소리.조금 서툴고 어눌했지만그 한마디에나는 순간 멈췄다.모든 소리가 멀어지고시간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그 짧은 말 한마디가가슴 깊은 곳에 남아작게, 하..
(육아, 에세이) 초음파 사진 앞에서 마트의 소란 속, 아이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공간을 갈랐다.얼마 전 손에 쥐여준 인형은 까맣게 잊은 듯,새것을 향한 고집은 끝내 바닥에 드러누운 발버둥으로 이어졌다.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얼굴이 뜨거워졌다.붉게 달아오른 아이의 얼굴 위로,문뜻 낯설고 서늘한 감정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미움이라 이름 붙이기엔 조심스러운, 그러나 분명한 감정이었다.제 세상에 갇힌 작은 고집쟁이.또 지갑을 열어야 하나,그 생각에 익숙한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차 안은 조용했고,그 침묵은 집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현관문을 닫으며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생각을 추스르려 부엌으로 들어섰고,익숙한 냉장고 문 위에빛바랜 사진 한 장이 조용히 붙어 있었다.그 장면이 마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흑백 사진 속,어둠을 닮은 배경 위로 작고 희미한..
(육아, 에세이)사랑은 완벽하지 못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날 밤,나는 아기에게 화를 냈다.울고 또 울고,달래도 안 되는 그 밤에나는 지쳐 있었고,고작 몇 시간 후 해야 하는 출근 생각에결국 목소리가 높아졌다.“제발 좀 자, 제발…”그리고 그 순간,아기는 잠시 울음을 멈췄다가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그걸 보는 나의마음도 무너졌고,피곤함과 죄책감이 뒤엉킨 채겨우 잠이 들었다.⸻아침이 왔다.내가 눈을 떴을 때,아기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어젯밤 있었던 일은기억도 못하는 얼굴로.팔을 허우적이며 반기고,작은 입을 움직이며 웃는 그 모습에나는그냥 울고 말았다.어젯밤,그토록 사랑하면서그토록 못 견뎌했던 나 자신이너무 미안해서.⸻아기는 모르겠지.어젯밤 아빠가 왜 그랬는지,왜 아침에 눈물이 났는지도.하지만 나는,그 작고 밝은 얼굴을 보며조용히 하나를 깨달았다.사랑은언제나 완벽하..
(육아, 에세이)그날 밤, 닭다리 두 개와 맥주 한 잔 육아의 고단함 속에서는,사소한 불씨가 쉽게 큰 다툼으로 번진다.그날도 그랬다.누가 아기를 더 오래 안았는지,밀린 집안일은 누가 더 많이 했는지—답 없는 질문으로 시작된 실랑이는금세 서로를 향한 날 선 말이 되어 꽂혔다.쌓이고 쌓였던 감정들까지 터져 나오며싸움은 예상보다 길어졌다.저녁이 다가와도 아내는 방문을 열지 않았다.나는 홀로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고,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끝냈다.텅 빈 식탁 위로 미안함이 조용히 내려앉았다.돌이켜보면,열 달을 품고 온몸으로 아기를 낳은 아내야말로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었을 텐데.나는 또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말았다.어색한 침묵을 깨고 싶었지만,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작은 용기를 내어,아내가 좋아하는 치킨을 몰래 주문했다.시원한 맥주도 함께.고소한 치킨 ..
(직장생활, 에세이)성숙한 위로 회사에 들어가처음으로 맡은 중요한 일이 있었다.거래처 사장들을 모아우리 제품을 소개하는 설명회를 여는 것.장소는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을 골랐다.방도 깔끔했고,설명회가 끝나면 식사하며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누면 되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막상 설명회가 시작되자식당엔 손님이 계속 들어왔고그 소음에 설명회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결국,거래처 사장 한 분이 말했다.“그냥 밥이나 먹자.”그 한마디로설명회는 그대로 끝나버렸다.—자책감이 밀려왔다.꼼꼼하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미웠고,상황을 수습하지 못한 무력감에속이 미어졌다.그날,혼자 화장실로 가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다스렸다.—그 자리에회사 마케팅 팀장님도 함께 계셨다.철저하고 냉정하다는 말이 많은 분이었다.그래서 당연히 크게 혼날 줄 알았다.—그런데그분은 내..
(육아, 에세이)아빠 손은 약손 “아빠 손은 약손—”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아기가 또 한 번 몸을 뒤튼다.배앓이가 심하던 그 시절.배 마사지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나는 매일 밤, 딸의 작은 배를 조심스레 문질렀다.서툰 손길이지만,괜찮아지기를 바라며눈을 꼭 감고 있는 아이에게작은 노래처럼 말을 건넨다.“아빠 손은 약손…”그 순간,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어릴 때,배가 아프다고 하면엄마는 늘 내 배를 조용히 만져주며노래처럼 그 말을 반복했다.“엄마 손은 약손, 아프지 않게 해줄게…”그 손길은고통을 덮어주는 따뜻한 이불 같았고,그 말은마음을 감싸주는 부드러운 숨결 같았다.그때는 몰랐다.그저 따뜻하기만 했던 손끝에얼마나 깊은 마음이 실려 있었는지.나의 작은 세상이,얼마나 조용하고 든든한 보살핌 속에 있었는지.세월이 흘러,내가 아빠가 된..
(에세이)말 없는 위로가 더 깊게 닿을 때 그날은온종일 괜찮은 척하고 있었다.코로나 여파로거래처가 폐업한 날직장 동료들 앞에서,별일 아닌 것처럼 웃기도 했고속으로 수십 번“이 정도는 그냥 버터보자” 다짐했다.근데…집에 도착해서 현관문 닫는 순간이상하게 목이 메여왔다.—밥도 먹기 싫고말도 하기 싫은 날.아내는 자고 있고집 안은 조용했는데,나는 괜히 조용한 게 더 버거웠다.—소파에 앉아고개를 숙이고 있는데아무 말 없이아내가 옆에 와서내 등을 토닥였다.무슨 일 있었냐고 묻지도 않고,왜 그러냐고 다그치지도 않고그냥…말없이,내 옆에 앉아 있었다.—그게 이상하게버티던 걸 무너뜨렸다.괜찮다고 말한 모든 순간이괜찮지 않았던 걸그 조용한 손길 하나에그냥 다 털어놓게 됐다.—그날 밤, 아내에게차마 고맙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지만나는 가슴 깊이 깨달았다.때로는 캐묻지..
(직장생활, 에세이)내가 지키고 싶은 것 영업사원 시절,월말이면 거래처를 직접 돌았다.물건을 팔았으니돈을 받으러 가는 건 당연했지만,때로는 고된 일이기도 했다.—어느 날이었을까.거래처 사장이 유독 날이 서 있었는지,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소리쳤다.“야, 바쁜데 왜 오고 지랄이야!내일 다시 와.”—순간,뜨거운 무언가가 속에서 확 치밀어 올랐다.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지만,아무 말 없이고개만 살짝 숙이고 돌아섰다.그 거래처는,내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곳이었으니까.—그날 저녁,친구에게 그 일을 털어놓자친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야, 너 그렇게까지 하는데자존심도 안 상하냐?”나는 조용히,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진짜 자존심 상하는 건…저런 욕설 듣는 게 아니야.저 거래처 놓쳐서,당장 내 가족들 밥 굶기는 거.그게 진짜 자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