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가댁에 가면
거실 구석에 조용히 놓인 오래된 피아노가 있다.
덮개 위엔 먼지가 앉아 있고,
건반은 눌릴 때마다 가끔 엇나간 소리를 낸다.
장모님은 그 피아노를 볼 때마다
습관처럼 아내에게 한마디 하신다.
“옛날엔 참 잘 쳤는데. 피아노 한 번 쳐봐.”
아내는 늘 그랬듯 웃으며 말한다.
“다 까먹었어, 엄마.”
—
사실 그 피아노엔
장모님의 오랜 시간이 담겨 있다.
젊은 시절, 농사를 짓는 남편에게 시집을 가셨고
딸 셋을 낳았다는 이유로 시어머니께 고된 시집살이를 당하셨다고 한다.
밭일에, 집안일까지.
하루하루가 빠듯했고
손은 늘 마르고 거칠어 있었다.
—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아내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작고 고운 손으로 건반을 누르던 그 모습이
장모님 눈엔 그렇게 예뻐 보였다고 하셨다.
“내 딸은 저런 고운 손을 가진 사람으로 키워야지....“
장모님은 자신의 손과 대조되는 딸의 손을 보며 그렇게 다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내가 어느 날 집에서도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장모님는 주저하지 않으셨다.
—
물론, 시어머니의 반대는 당연했다.
딸만 셋 낳았다고 눈치 주는 집에서
비싼 피아노라니, 말도 안 됐겠지.
그래도 장모님은 물러서지 않으셨다.
집안 일을 안 하고, 밭일도 안 나가고
끝까지, 단단하게 버티셨다고 했다.
그렇게 사오신 피아노.
비싸지도 않고,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건 장모님 마음속에서
작은 훈장처럼 남아 있었던 것 같다.
—
이제 아내는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손끝은 다른 일로 바빠졌고,
건반 소리는 점점 잊혀졌지만
장모님은 여전히 말하신다.
“피아노 한 번 쳐봐.”
그 말 안에는,
그 시절 딸에 대한 다짐,
그리고 단단한 의지로 지켜낸 사랑이
지금도 조용히, 피아노 안에 살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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