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에세이)사랑은 그렇게 익어간다

워킹대드의 기록 2025. 4. 12. 12:41
728x90
두 사람의 오래된 사랑 이야기. 서로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며 익어가는 감정에 대하여.


스무 살을 갓 넘겨 연애를 시작한
아내와 나는 동갑내기였다.

나보다 먼저 사회에 발을 디딘 건 아내였다.

풋내기 학생이던 내게,
그 시절 데이트 비용은 거의 아내의 지갑에서 나왔다.

아내는 늘 나의 필요를 먼저 살폈다.
변변한 지갑 하나 없던 내게 지갑을,
낡은 가방 대신 새 가방을,
닳아가는 운동화를 보고 새 신발을
먼저 건네주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것은
진심이 오롯이 담긴 아내의 사랑 표현 방식이었다.



길었던 취업 준비 끝에,
고대하던 첫 월급 봉투를 손에 쥐었던 날.

벼르고 벼르던 지갑과 옷을 사서
아내에게 건네며 나는 말했다.

“이제,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내가 다 살게.”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환히 웃던
아내의 그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그 순간의 행복은,
어쩌면 아내의 웃음보다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서로를 향하던 그 마음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챙겨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한 발씩 물러선다.

“당신, 그때 그 가방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자기는 이제 핸드폰 바꿀 때 되지 않았나?”

그러면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대답이 돌아온다.

“나는 괜찮아. 당신 가방부터 사.”
“난 아직 쓸 만해. 자기 핸드폰이나 얼른 바꿔.”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필요는 먼저 읽어내면서,
자신의 몫은 조용히 뒤로 미룬다.

서로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자신에게는 신기할 만큼 인색해지는 마음.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랑은,
아마 그렇게 깊어가는가 보다.